본 연구는 TEPI의 책임연구원인 김엘리의 2018년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과 교수신문이 함께 기획한 발표된 『분단극복을 위한 집단지성의 힘』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이 곳에 전문을 싣습니다. 분단된 마음, 군사주의와 페미니즘 분단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사드 배치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사드 배치가 필수적이라는 정치인들이 있는가하면, 군사 공격의 타깃이 될 수 있는 마을 주민의 안보를 위해서 사드 배치는 재고해야 한다는 시민들도 있다. 정치적으론, 사드 배치를 둘러싼 입장은 대선 후보자들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도 한다. 한미동맹에서 사드 배치가 어떤 실익이 있는지, 무기 군수 산업의 농간은 없는지 합리적으로 따지기도 전에 사드 배치를 둘러싼 이견은 안보 프레임에서 사상성으로 번역된다. 분단사회에서 ‘다름’은 적을 이롭게 한다는 해석으로 쉽게 환원되고 오역된다. 분단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이 멈추어 있다는 것. 약 70년 동안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것. 안보가 내부 사회를 통제하는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 이모저모의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겠으나, 분단이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감정 구조에 긴밀히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봄직하다. 잘 보이지 않으나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적의 언설은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정서구조를 만든다. 누군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정치적 언설로 사람들은 불안하고 두렵다. 누군가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형성되는 국민의 정체성은 자기 검열 안에서 불안정하다. 이러한 불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타자화하면서 공격하는 정서적 기제가 된다. 때로 이 불안증은 일부 사람들에게 진보적 사람들이나 동성애자들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가는 과대망상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개인적인 심리현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공유된 집단 감정이다. 이 집단감정은 오랜 시간 만들어진 일종의 관성이다. 군사주의는 이 관성에 스며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주의를 불러낸다. 불안은 반공주의를 통해 군기를 잡으려는 군사주의적 질서관을 재생시킨다. 적이라는 개념은 군사주의를 작동시키는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적(그들)과 아군(우리)을 나누고 적을 죽임으로써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논리는 부국강병으로 이어지고 군사력의 강화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군사적 해결은 가장 효율적으로 여겨진다. 갈등의 상황이 되었을 때, 대화와 논의, 협상의 과정을 통해 그 방안을 모색하기보다 군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전쟁이나 군사적 가치를 찬양하고 지향하는 사유와 태도, 행위 양식을 군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군사주의란 사회가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성 혹은 사람들의 행위와 사유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사회적 에토스라고 할 수 있다. 이원화된 체제에 뿌리를 둔 군사주의 페미니즘은 적과 아군으로 나누어 적을 정복해야하다는 군사주의적 사유가 성차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여성과 남성,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명으로 범주를 나누고 열등과 우월의 가치로 배열하는 이원화된 체제는 군사주의를 지탱하는 사유이자 성차별과 인종차별, 제국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근거이다. 군사주의는 이러한 이원화된 체제에 뿌리를 두고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신자유주의의 결을 따라 움직이며, 이들과 결합하면서 자신을 위장한다. 페미니즘은 이 보이지 않는 군사주의를 드러낸다. 특히 군사주의가 젠더 체제에 기대어 작동한다는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숨어있는 군사주의가 다른 범주들과 어떻게 결합하여 일상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페미니즘은, 적이 문명화된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로서 존재하며 매우 젠더화된 방식으로 재현된다는 점도 밝힌다. 70-80년대의 북한은 주로 짐승이나 얼굴 없는 적으로 재현됐다. 얼굴 없는 비인간적인 형상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한과의 관계는 미묘하고 모순적이다. 군사적으로는 정복해야할 적이지만 통일의 시대를 함께 열어가야 할 평화공존정책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점차 증가하는 탈북자가 우리 가까이에 살고, 2002년 아시안게임의 응원단으로 남한에 온 북한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북한에 대한 재현양상은 변화한다. 1999년 제작된 영화 <쉬리>는 대표적이다. <쉬리>에서 북한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잔인하리만큼 폭력적이다. 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문명으로 재현되는 남한과 대조된다. 이원화된 재현은 열등과 우월이라는 가치 체계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정치를 통해 재배치되어, 강함-남성성-우월, 약함-여성성-열등이라는 젠더화된 얼굴을 한다. 남성화된 주체와 여성화된 타자 사이의 관계에서 북한은 여성화된 타자로 구성된다. 이러한 재현이미지는 ‘무공해 미인,’ ‘신토불이 얼굴’로 칭송되었던 북한여성응원단들을 읽는 미디어의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언론은 북한 여성을, 민족적 동질성을 재현하며 민족의 순수성을 보전한 기호로 언설한다. 그들은 남한의 문명화와 구분되는 자연이며, 고향의 원형이다. 탈북자들이 출연하는 종편채널의 TV프로그램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방희경과 이경미 연구원들이 2016년 <한국언론학보>에 발표한 ‘종편채널의 북한이미지 생산 방식’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북한은 전근대적이고 미성숙한 이미지로 재현되면서 향수와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열등한 타자로 여성화된다. 남한이 문명화된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은 미국이 북한을 ‘위험한 국가’로 규정하는 언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미국 국방부와 북미의 비수교 관계는 북한의 적 이미지를 구조화하여 고착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작용한다. 여기서 남북한의 동질성을 강조한다면, 그 뿌리는 같은 핏줄로 맺어진 가족과 가족의 연장인 민족이다. 이 혈연공동체는 여성/성을 순수한 민족과 동일시하면서 무시간적이고 탈역사적인 자연의 존재로 둔다. 기본적으로 우리와 적의 경계를 지어 우리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군사주의적 속성은 타자에게 의존하면서도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구성하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반공주의나 파시즘적 경향성, 마초적 남성에토스도 이 속성으로 구성된다. 평화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탈분단을 생각하며 분단은 통일로 극복되어야한다는 자동 응답기식의 해법은 해묵은 발상이다. 분단을 탈하는 방법은 꽤 지난하고 농밀한 진단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그동안 분단을 지속시키는 구조적 체제에 관해 논하고 인간과 사물들의 수행성을 드러내며,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들을 분석해왔다. 그런데 ’구조와 수행성은 젠더에 기대어 작동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드러낼 때 온전한 탈분단을 모색하는 길이 열린다. 그뿐 아니라 통일이 탈군사화로 이어진다는 비전은 매우 순진한 발상이므로 탈분단의 과정에서 반드시 짚어야할 지점은 군사주의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군사주의는 분단으로 인해 더 심화되고 편재하지만 통일을 이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탈분단을 모색하는 일은 좀 더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이해와 접근을 요한다. 그러면 탈분단의 길은 평화를 만드는 과정으로서 탄탄해진다. 이원화된 체제를 견고하게 하는 경계들은 이미 흐릿해지고 모호해지고 있다. 한민족 핏줄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민족들이 한국에 상주하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젊은 세대들은 다문화사회에서 태어나 글로벌 사회에서 산다. 또한 적과 아의 이분화된 거리를 경쟁과 전쟁으로 정복하여 아의 공간으로 타자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광장으로 변화시키려는 행위에서, 자기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남성들도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취약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생적 의존이야말로 이원화된 체제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평화페미니즘은 이원화된 사유에서 탈주하는 삶의 양식을 기획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김엘리 (2018), “분단된 마음, 군사주의와 페미니즘” <분단극복을 위한 집단지성의 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신문 기획, 한국문화사. 자료에 관하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