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평은 책에 실린 추천의 글입니다.) 추천의 말: 폭력과 평화에 대한 폭넓은 성찰 이 책의 큰 질문은 ‘사람들은 왜 항상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한 순간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이다. 너무 쉽고도 어려워서 잘 묻지 않는 이 질문에 보통 두 가지 종류의 답이 있다. ‘세상은 어차피 그래(그러니 신경 꺼)’라는 답과 ‘아냐, 이젠 달라질 거야(좀 따져 보자)’라는 답이다. 이 책은 후자의 답을 찾고자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여기에 저자 다케나카가, 지난 반세기 동안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에 관해서 축적된 다양한 정보와 지혜를 바탕으로 ‘이제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달렸다’라는 메시지를 친절하게 풀어 놓고 있다. 평화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상생활과 국제정치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는 폭력의 구조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폭력의 구도에 관한 설명을 개인의 경험과 더불어 폭넓은 국제적 관점에서 자세히 펼치고 있다. 강대국과 강대국의 관계, 강대국과 약소국의 대립, 그리고 최근 국제상황의 다변적 변화에서 다양한 폭력의 구도가 찾아진다. 이처럼 평화의 성찰은 폭력의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폭력이 구조적 성격을 가진 까닭에 삶의 여러 방면에서 유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 책에서 논의하는 빈곤과 갈등, 이슬람과 세계, 서구 백인 중심의 문명관, 무기수출 등이 좋은 예이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도 경솔한 사례로 거론된다. 평화 문제는 언뜻 관련이 적어 보이는 빈곤, 인권, 인종, 젠더, 국제관계, 사회변동 등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좋은 모범을 제시한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의 질문은 계속 제기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이 책의 윤리적 메시지는 평화에 대한 성찰이 방관자, 관찰자의 태도로는 깊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방관자나 관찰자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어차피 그래왔어’라고 하면서 ‘원래’와 ‘어차피’의 비관적 주문을 반복한다. 이 경우 세상의 문제는 아주 간단히 정리된다.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권력 질서의 불가피성에 이렇게 승복하게 되면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들은 통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폭력적 질서의 지배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방법은 ‘원래 그래’와 ‘어차피’의 비관적 자기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즉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 ‘나도 무언가 바꿀 수 있다’, ‘이런 비참함은 방관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각성과 상상, 그리고 연대감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가 묻는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는 그래서 매우 ‘깊은’ 질문이기도 하다. ‘어차피’에서 ‘그렇다면 어떻게’로의 이동은 작지 않은 대전환이다. ‘그렇다면’의 직전에는 커다란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는 이랬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과거지향적인 ‘원래 그렇다’와 정반대다. 토론하기 싫어하거나 자기 생각을 고집하거나 헛된 권위를 내세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래’라고 말문 막기를 좋아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이라는 질문은 스스로의 변화, 스스로의 실천적 결단 없이는 평화에 관한 성찰을 진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 바로 해답을 찾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화가 고갱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그린 그림에 붙였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어떤 사회나 종교에서도 되풀이되어 온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찾는 순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관한 답도 어렴풋하게 보일 것입니다.” 즉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어차피 그래’라고 답할 것이 아니라면, 이는 결국 무언가 변화를 위한 생각이나 실천을 하고 싶다는 것인데, 그 출발점은 내가 속한 ‘우리’를 비판적으로 뜯어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역사와 속성에 대한 비판이 타인과의 연대를 위한 비판적 실천의 출발이 된다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다. 저자가 자신의 원래 독자들인 일본의 청년들을 염두에 두고, 왜 세계정세를 알려고 하지 않을까, 왜 세계는 안전한 세계와 위험한 세계로 나뉘게 되었을까, 단순히 위험한 나라에 살기 때문에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일인가 등의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은, 자신의 ‘우리(‘we’이기도 하고 ‘울타리’이기도 한)’를 부수지 않고선 결코 훌륭한 답이 찾아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독자들도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강조하는 것은 평화를 성찰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권, 국가권력 견제, 정의 구현, 국제기구의 역할, 군축 등의 관련된 주제에 일정한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 부재한 상태를 평화라고 여기는 소극적 관점이 아닌, 새로운 정의의 질서를 형성하는 적극적 관점에서 평화를 보자면, 평화를 보장하는 질서는 이 책에서 서술된 것처럼 보통 네 가지 수준에서 모두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회 및 정부와의 관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나라 및 세계와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수준의 관계를 정의롭게 개편하는 바탕, 즉 평화적 질서의 바탕은 모든 사람이 생존과 행복, 자유와 참여 등 기본적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시사점 중의 하나는 지금까지 세계가 운영되어 온 방식에 커다란 정당성의 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방면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정치나 권력의 본질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증진시키는 데 있지만, 최근 한국에서 보는 것처럼 거꾸로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서 약자의 존엄성과 안전이 방기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세계의 상호연관성이 증대함과 더불어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면서 약자에 대한 연대감보다 책임 방기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 권력구조의 꼭대기에 있는 세력들이 정당성을 크게 잃고 있다는 경고가 제기되고 있고, 이 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은근한 경고를 담고 있다. 폭력은 테러집단에 의해서만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지속된다. 즉 폭력은 폭력적인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위 적을 대하는 방식, 군사원조를 주고받는 방식, 전쟁에 개입하는 방식, 대도시 문명을 추구하는 방식,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 빈부격차를 만드는 방식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자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강요된 상상과 관습, 보호해야 한다는 상상과 보호 대상을 필요로 하는 상상과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 이 책이 한국의 독자층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로 남게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세계화의 시대에 평화에 대한 구상은 새로운 국제 질서의 대안을 찾는 것과 긴밀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미 세계는 충분히 상호의존적이다. 저자가 말하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는 그러한 세계화의 결과이기도 하고 기이한 상호의존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가 너무나 의존적이며 긴밀하게 얽혀 있는 까닭으로 풍요로운 쪽의 평화가 다른 쪽의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의 평화가 너의 폭력이 될 때 우리는 편히 살 수 있을까? 이 책이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적 정의가 이제 한 나라의 국경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국제적 차원에서 새로운 공적 정당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4장과 5장에서 지구촌에서 폭력을 통제하기 위한 규칙과 방법을 상술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촌 운영의 새로운 정당성은 더 이상 풍요와 안전을 소수의 기득권층에게 국한시키는 방식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미국 군사력의 한계에서나 이슬람 세계와 맺어야 할 새로운 관계에서 보이듯 새로운 정당성은 군사력으로 획득될 수 없다. 새로운 정당성은 강압이 아니라 동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동의는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빈곤퇴치와 안전보장을 제공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폭력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제안하고 있다. 평화는 단순히 눈앞에서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며 안보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세력 균형이나 무기 현대화, 파병 따위를 말함이 아니다. 깊은 평화의 비전은 정의구현에서 나온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체제를 정의롭게 개조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힘든 여정이 되리라. 그 첫걸음을 내딛을 힘을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이에 대해 고통의 공유가 평화 만들기의 출발이라고 시사한다. 남과 고통을 공유하라니. 우리는 정말 다른 이들이 아파할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을까? 아픔까지는 아니더라도 슬퍼할 수는 있을까? 고통을 통해 연대를 이끌어 내는 원천이 바로 슬픔이다. 슬퍼하지 않고서는 고통받는 타자, 나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와 연대할 수 없다. 서로 깊이 연관된 세계에서 나 자신이 진정 홀로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면, 이 세계의 슬픔은 끊임없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슬퍼하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고통의 공유는 여러 번 곱씹어야 할 주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국제적 감각의 평화론 교양서이면서, 요즘 한국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는 절망스럽기까지 한 졸부의 열망과 ‘부국강병’에 대한 편집증에도 작은 회복제가 될 수 있을 만한 책이다. 편협한 국익론과 자국 중심의 몰아적 오만함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는 폭력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연대의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아마도 진정한 평화의 여정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주어진 ‘우리’를 부수는 것과, 그 협소한 ‘이익’에 대한 반성을 세계 곳곳의 약자에 대한 연대감으로 바꿔 나가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한 가지, 이 책에서 폭력의 연쇄구조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라는 구도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에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적 행동이나 이민자에 대한 부유한 사회의 배타적 태도는 이러한 구도에서 잘 설명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구도의 전제, 즉 한쪽은 풍요와 안전이 있는 곳이고 다른 쪽은 그것이 결여된 세계라고 전제하는 것은 두 세계를 우열관계로 고정화시킬 위험이 있다. 물론 필자는 이와 같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 “질서가 무너지고 폭력의 요소가 뿌리내리기 쉬운 세계”의 바탕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불평등과 분열이 폭력의 구조적 토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서 폭력의 다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의 폭력구조가 풍요와 발전이 양분된 구조에 기인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중고생의 높은 자살률 문제, 그리고 깊어지는 계급격차 문제 등처럼 풍요로운 사회에도 그 나름의 깊은 폭력성과 폭력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사는 나라를 가리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라고 명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전’과 폭력에 대한 깊고 다면적인 접근을 방해한다. 특정한 삶의 형태와 문명을 보다 ‘안전’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와 다른 것을 폭력적으로 보는 안전의 이분법 역시 폭력구조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평화주의자들은 폭력이 공권력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와 성차별에도 큰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서구 숭배와 인종차별에도 큰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은 대량 살상무기의 지구적 확산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전쟁과 군대를 완전히 불법화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유엔에서는 병역과 참전을 거부할 권리를 누구나 향유할 기본적 인권으로 이미 인정하고 못 박아 두었다.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은 군대가 만들어 내는 남성 우월적 가치와 행동이 일상생활과 세계를 동시에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계화를 반성하는 사람들은 ‘기업의 자유’와 ‘경제적 이익’ 앞에 인간의 존엄성과 환경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항의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사회가 야기하는 지구촌의 빈곤과 파괴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문명을 다시 성찰하는 사람들은 서구의 발전모델만을 좇는 ‘속도의 경제’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주의 세계화와 세계화된 이주민 차별을 경험하면서 사는 곳과 상관없이 이주자들을 온전한 시민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큰 파도를 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장점은 폭력과 평화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성찰과 실천이 세계 곳곳에서 축적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여기에 너무나 쉬운 비관적 답이 아닌 다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전쟁 그 자체보다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전쟁(그러므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너무나 많은 장치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점을 이 책은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책: 다케나카 치하루,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노재명 역, 갈라파고스, 2009)서평: 이대훈, 200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