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 피스모모 평화/교육 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오은영 피스모모 평화/교육 연구소 상임연구위원님이 생태매거진 <바람과물 12호 '인류세 이야기'>에 기고하신 글을 소개합니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나는 지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6년 반 동안 인도 북부 히마찰프라데시주의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난민 마을에 살면서 티베트 난민을 지원하는 NGO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주로 했던 일은 중국의 지배를 피해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인의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고, 티베트어로 된 동화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한 다람살라에서의 일상은 그들이 겪는 현실에 비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티베트인들 앞에는 기약이 없는 난민 생활, 난민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 서거 이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여전히 강력하게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존재 등 냉정한 현실이 놓여있었다. 티베트 현지에서 그리고 인도에서조차 이어졌던, 중국의 지배에 항의하는 분신과 독립운동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상태에서 난민 사회는 어떤 희망도 찾기 힘들었다. 티베트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생활하면서 과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70년 넘는 시간을 보내온 티베트인들의 삶이 언젠가는 바뀔 수 있을까,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평화학을 공부하면 어떤 답을 찾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평화학은 60여 년 전에 정립된 비교적 새로운 학문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진 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전쟁의 종식을 뜻하는 평화에 대한 갈구 또한 인류가 내내 꿈꾸어온 것이기도 하다. 전쟁과 평화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에야 평화학이 학문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1950년대 말 요한 갈퉁(1930~2024)이라는 젊은 학자가 평화 연구를 학문으로 정립할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인류를 둘러싼 갈등과 폭력을 어떻게 종식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가 분석해낸 것은 직접적 폭력과 간접적 폭력의 구분이며 간접적 폭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구조와 문화를 변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말하자면 갈등과 폭력을 눈에 드러나는 직접적 폭력의 관점에서 제거하는 것(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폭력, 불평등이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는 사회구조에 내재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인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이 제거된 상태(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지향했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지배를 핵심으로 하는 서구 문명이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 역사의 방향이라고 선언해 온 근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이전까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온 개발이론이 평화의 추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런 지배 담론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만들어 평화를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회의 구조가 폭력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평화는 부단히 지속되는 폭력을 제거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그 폭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혹은 (재)생산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전쟁은 기후전쟁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국제적 폭력의 양상을 살펴보면 명백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갈등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 자원을 놓고 벌이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경쟁이 폭력화하여 전쟁이 되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원인이 기후의 급속한 변화에 의한 것이라면 그에 대한 대응 또한 달라져야 한다. 인류에게 필요한 각종 자원의 고갈을 초래하는 급속한 기후변화가 실질적인 생존의 위협이 되면서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3년 아프리카 수단 다르푸르에서 발생한 대규모 학살과 분쟁은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이 촉발한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도양의 수온이 올라가면서 강수량의 빠르게 감소했고, 이로 인해 목축과 농사에 필요한 땅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토지와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국제전략연구소CSIS는 다르푸르 사태를 최초의 '기후전쟁'으로 꼽기도 했다. 평화운동 진영이 기후변화, 나아가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작물 재배 가능지역과 인간의 거주 가능지역을 변경시키고 사막을 확장하고 식수 부족과 홍수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나라들에서는 이미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들의 이동이 국가 및 민족 간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화운동가들이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갈등의 폭력화 양상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24년 3월에 열린 제55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평화와 기후가 가장 많이 언급되면서 기후변화와 분쟁의 상관관계에 주목한 것이나 역시 올해 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사국들의 ‘기후․평화․안보 공동서약’ 서명을 끌어낸 것은 기후와 평화의 문제가 분리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기후전쟁이라는 용어는 기후위기로 인해 촉발된 전쟁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전쟁이든 기후위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기후와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세계 각국 정부는 기후위기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보고, 이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난민의 이주나 이로 인한 분쟁을 막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대부분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의 해결책을 찾고 있는데 이러한 군사력의 유지와 군대의 운영은 역설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기후위기를 심화시켜 인류의 삶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진정한 안보라고 볼 수 없다. 현대 전쟁은 온실가스가 그야말로 대폭발하는 현장이다. 전투기와 전함, 탱크와 군용차를 운행하면서 내뿜는 온실가스는 기본이고 총알과 화약, 폭탄, 미사일 자체가 온실가스 덩어리다. 미군의 온갖 신종무기 실험장이 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드론 무기 등도 고에너지의 온실가스 덩어리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또 하나의 기후전쟁이다. 즉"패권과 기득권 확보를 위해 석탄과 석유, 가스를 더 많이 불태워버리는 ‘현재의 탐욕’과 ‘미래 기후평화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 분야는 온실가스 관리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아 기후위기 대응의 사각지대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환경을 ‘자원’으로 소모하며 ‘국가 안보’ 내지 ‘평화유지’나 ‘국민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국방 활동이라는 이유로 환경 책임을 면제받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안보와 평화를 목표로 적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고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군대의 활동은 모순되게도 전 지구적 생태위기를 가속하면서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비인간 존재들에게까지 위협을 끼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후위기가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전쟁이 기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후위기와 전쟁은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있다. *박승옥,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기후전쟁인가’, 《프레시안》, 2022.9.15. **황준서, ‘파괴의 시대에서 녹색평화의 시대로 – 녹색평화를 위한 급진적 제안들’, 제2회 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처 펠로우십(Asia Young Activist Researcher Fellowship, AYARF), 2020, 서울시 청년허브. 기후문제 해결로 평화의 환경 만들어야 전 세계적으로 이미 빈곤과 불안정한 통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지역에서 갈수록 증가하는 불안과 환경 파괴의 결합은 새로운 위험을 만들고 있다. 기후변화는 평화에 나쁜 영향을 주고 폭력적인 갈등의 역학을 부추기며 취약성의 상황을 재생산한다. 기후위기라는 현재 상황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전쟁을 끝내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력 구조에 의해 형성된 취약성이나 특권적 상황에 의해 저질러지는 체계적인 해악인 구조적 폭력을 다루는 것을 포함해야 함을 보여준다.*평화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요한 갈퉁의 주장에 따른다면 기후위기 시대의 평화는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Nicoson, Christie, 2021a. “Degrowing for peace? Tackling structural violence and climate resilience” https://www.resilience.org/stories/2021-02-12/degrowing-for-peace-tackling-structural-violence-and-climate-resilience/ 기후위기가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기후와 평화라는 두 개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스톡홀름평화연구소 Sipri가 제안하는 ‘평화의 환경 Environment of Peace’이라는 개념은 이미 착취와 빈곤, 불안정한 통치에 더해 환경 파괴가 결합한 위험의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선택이며, 이를 통해 평화의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온 상승, 폭염과 가뭄, 홍수, 산불 등을 일으키는 기후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갈등을 불러오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바로 평화의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성장과 개발의 체제를 기후위기 체제라고 한다면 평화의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기후평화 체제로의 전환이 인류의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기후평화 체제로의 전환, 즉 기후위기에 의한 갈등을 어떻게 평화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가 하는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러한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거나 상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자연환경의 복원, 기후변화의 중단, 갈등하는 주체들 간의 평화적 관계 전환, 갈등보다는 평화와 협력에의 투자 등을 통해 평화의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계속 증가하고 플라스틱이 바다를 질식시키고 극지의 빙하가 녹아 없어지고 지역 사회가 의존하는 생태계가 사라지는 한, 세계가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Sipri, 2022, Environment of Peace 기후위기 시대의 갈등과 폭력을 적절히 다루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당사자 사이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폭력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평화연구자들은 존재하는 갈등을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전환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평화학자 존 폴 레더락이 제안한 ‘갈등 전환과 이를 통한 평화 구축’에 관한 이론은 기후변화와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두 가지 위험이 어떻게 동시에 해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기후활동가와 평화운동가에게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일으키는 갈등의 당사자들이 서로를 적대적인 방식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로 보기보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긍정적인 관계로의 전환이 가능한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후위기로 촉발되는 권력과 자원에 대한 불균형한 접근과 분배를 해결하는 전환의 과정이 바로 평화 구축의 방안이기도 해서 니코슨과 같은 학자는 ‘기후회복력 있는 평화’*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후 피해가 근본적으로 권력 구조 안에서 더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는 “이익보다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다른 경제시스템으로 전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지금과는 다른 권력 구조에 토대를 둔 다른 경제시스템, 지금까지 사회를 작동해 왔던 경제적 원리와 구조로서의 성장이 더 이상 핵심 경제 목표가 아닌 상태를 탈성장(degrowth) 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에야 사회적 및 환경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후회복력 있는 평화를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평화는 이러한 위기를 유발하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권력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하며, 이는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공감과 전환을 수반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후위기 자체가 전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한 국가나 사회의 전환만으로는 이미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Nicoson, Christie, 2021b, “Towards climate resilient peace: an intersectional and degrowth approach” **Nicoson, Christie, 2021a 인도 다람살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에게도 기후위기는 무관하지 않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티베트 고원의 기온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중국의 지배가 끝나더라도 티베트 난민들이 돌아갈 고향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경고와 같기 때문이다. 유목민이 절반 이상인 티베트 사람들에게 기후가 변하고 그로 인해 가축을 먹일 풀이 부족해진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미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잃고 가축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북극, 남극에 이어 ‘제3의 극’이라고 불리던 티베트 고원은 이제 만년설 대신 물이 질척이는 늪지가 되어가고 티베트 유목민들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 도시의 빈민이 되었다. 이들에게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것만큼이나 평화로운 생존과 직결된 일이다. 갈등의 당사자인 중국인과 티베트인이 함께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평화적인 관계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 올까? 파국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는 노력에 더해 갈등이 아닌 평화와 협력에 투자함으로써 기후평화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기후위기의 시대를 사는 평화운동가로서 나에게 이 질문은 난민으로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과거의 나에게 다시 연결시켜 주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평화를 소망하는 지금 시대의 모두가 나누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그 답을 찾아가는 길에 모두가 공존하는 세계를 실현할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을 마무리하던 중에 경북 청도에서 폭염으로 인해 물 사용량이 생산량을 초과하여 2480가구의 물 공급이 끊겼다는 기사*를 접했다. 생산량이 사용량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느 지역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기후의 변화가 자원의 부족으로 그리고 자원의 부족이 갈등을 넘어 폭력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의 응답이 필요한 때다.*“폭염 속 경북 청도 일부 지역 이틀째 물 끊겨”, 2024년 8월 6일자, YTN 뉴스, https://www.ytn.co.kr/_ln/0115_202408060113100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