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 미소의 살림, 살림의 미소: 영화 "소공녀"(Microhabitat, 2017)을 보고

"적극적 평화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된다면 풀이말로 미소(주인공 이름)의 모든 움직임을 써넣고 싶다. 의사나 약사만 사람을 살리고 고통을 줄여주는 게 아니란 걸 알리고 싶다." - 본문 중에서 - 최정희 (펭펭), 피스모모 커뮤니티 매니저VOICE 2020/04-2 민지와 미소, 그리고 닭백숙 아래는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이다. 불이 다 꺼진 오피스텔 안에 집 주인 민지가 앉아있다.오피스텔을 치워주고 4만 5천원의 일당을 받는 가사도우미인 미소는자신을 고용한 민지가 집에 있는 것을 보는 게 처음이라 놀란다.민지는 창 밖을 바라보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덤덤하게 전한다.애 아빠가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웃으며 덧붙인다. 제가 좀 헤퍼요 언니. 그래서 벌 받나.- 헤픈 게 어때서요. 언니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알아요?- 네. 근데도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네. 미소는 곧 물을 끓여 민지에게 차를 내어주고,입고있던 잠바를 벗어 민지의 허벅지를 덮어준다. ⓒ 영화 소공녀 여행용 캐리어와 큰 백팩을 매고 다니는 미소와유흥업소의 일을 그만두어야하면 이 집을 반납해야 하는 민지는 이제 홈리스 동지다. 차를 마시던 민지는 미소를 향해 손톱을 내보이며 이쁘지 않냐고 묻는다.이 일을 접고 네일샵을 차릴거라고, 손 만져주는게 너무 좋다고 생글댄다.그런 민지를 바라보던 미소는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 민지는 고개를 떨군다. 언니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요.나 이제 이 집도 반납할거고,그럼 나 이제 언니 못 봐요.무슨 말인지 알아요?언니 짤린다구. 유 파이어. (fired) 질질 울며 미안하다 말하는 민지에게 미소는 왜 나한테 미안하냐고 되묻는다.민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자신은 기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인다.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땡기는 게 있냐 묻자 민지는 울먹이며 닭백숙이라 답한다.둘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미소가 삶아낸 백숙을 함께 뜯어먹는다. 나의 옹졸함과 미소의 단단함 자원이랄게 이미 없거나 없어져버린 여성 둘이 마주앉아 응원과 위로와 돌봄을 주고 받는 현장.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는 민지에게 닭백숙을 뜯어주던 미소를 자주 떠올렸다. 집보다는 방에 가까운 미소가 살던 곳의 월세는 5만원 올랐고,위스키도 2천원, 담배값도 2천원 올라 이대로면 수입대비 마이너스 상황이다.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할 수 없는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과거에 밴드를 함께 한 멤버들에게 연락해 그들의 집을 돌며 묵고있다. 그러던 중 가사도우미 일까지 그만두게 될 처지인 미소가 민지에게 먹일 닭을 삶고 있다. 옹졸한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미소에게 묻는다.불안하지 않냐고. 이제 위스키도, 담배 살 돈도 한 동안 벌 수 없을텐데,앞으로 만날 일 없을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쓰는게 아깝지 않냐고.하지만 단단한 자기존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미소에게 이런 질문이나 하는 나는, 실은 부끄럽다. ⓒ 영화 소공녀 살림의 가치 만약 공부도 반장도 곧 잘 하는 아이가 '가사도우미'가 꿈이라고 한다면 주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돈'이나 ‘능력'이란 단어로 자주 다투는 부모님을 보며, 돈이 적은 어른이 될까 불안했다.나는 어떤 직업은 돈을 많이 벌어 집도 차도 가지는 것이 당연하고,어떤 직업은 그렇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굳어진 채 자랐다. 하지만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이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엄마인데, 왜 이 집의 주인은 엄마가 아닌 아빠인지. 미소가 월세를 드리는 집주인 아저씨의 ‘진짜 집주인’과,민지가 반납할 오피스텔의 주인인 ‘오빠들’은 이 영화에 둥장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집의 주인들은 화면 밖을 누비며 살고 있고,집을 쓸고 닦는 이들은 잘려서 짐을 싸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 영화 소공녀 나에게도 살림은 돈도 인정도 못 받고, 딱히 티도 안 나는 지긋지긋한 반복의 일이었다.딸로 태어난 숙명으로 나는 안 할 수도 없는 이것들(살림)을 짜증스럽게 해치워왔다. 하지만 나는 대학 졸업 후 살림과 돌봄의 가치를 중시하는 단체에서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대표님은 출근하자마자 창문을 모두 열고 빗자루를 잡았고, 내게 밥은 먹었는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자주 물었다.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며 모니터를 쏘아보는 내게지금은 꽃게가 제철이라며 장을 봐오라 한 후 탕을 끓여 밥을 먹였다. 단체 언니들이 보여주는 살림은 해치워야 할 일이 아니라하루를 잘 보냈다 느끼게 해주는 쪽에 가까웠고,잠깐일지라도 빛나는 순간을 만드는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강사를 초청하고 여성주의나 생태주의를 공부하는 것도 좋았지만, 단체에서 만난 언니들의 미소와 닮은 움직임은,나에게 무엇이 사람을 살게하고 살리는지 보여주었다. 미소의 살림, 살림의 미소 미소는 어딜 가든 끊임없이 쓸고 닦고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든다.1인가구인 나는 그 노동들이 절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 성실함과 단단함에 감명받는다. 살림의 어원은 ‘살리다’.의사와 다를 바 없는 이 노동에 당연하게 ‘낮은’ 값이 매겨지는 것에 수 년 째 분노 중인 난 모니터 옆에 드러누워 씩씩댄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다시 모니터를 쏘아보며 눈에 보이는 성과나 커리어에 먼저 시간을 쏟는 스스로를 본다.방은 몇 일 째 먼지 쌓인 그대로다.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미소처럼 살 수 없을 것 같다.밥 먹었냐 묻고, 반찬을 만들어 두고, 슬퍼보이는 이에게 이야기 나누자 말을 걸고,기력 없는 이의 방을 치우는 미소. 미소의 움직임이 만드는 울림이 분노에 지친 나에게 묻는다.무얼 먼저 해야 너가 살 수 있냐고. 적극적 평화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재된다면 풀이말로 미소의 모든 움직임을 써넣고 싶다.의사나 약사만 사람을 살리고 고통을 줄여주는 게 아니란 걸 알리고 싶다. 아프거나 바쁘거나 또는 둘 다인 모드로 지내는 곁들이 태반인 요즘이다.앞으로는 나아질까, 늘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여기며 작심삼일이 될 다짐을 적어본다. 밥을 해 주진 못해도 밥 먹었냐 묻기,물을 끓여 따뜻한 차 내 주기,만나기 어렵다면 잘 지내냐 안부 묻기. 미소의 약식버전이지만 이 정도라면 매일 하나씩은 해볼 수 있겠다.'지금은 어떻게든 아플 수 밖에 없는 세상아닐까'라는 친구의 말에아직 대답을 찾지 못했고 주어진 일들을 하다 해가 져버리더라도. -------- 한솔이(미소 애인), 위스키, 담배 이 세가지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미소.갑자기 나의 세 가지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압력밥솥으로 지은 찹쌀현미잡곡밥이다.주말이 되면 나머지 두 개를 찾아 적어봐야지.벌써부터 후보로 퐁퐁 떠오르는 단어들이 날 설레게한다. 아, 그 전에 책상에 쌓인 먼지 먼저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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